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초상(들)

 

 

현재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는 주황 작가의 개인전 《온전한 초상(Her Portrait)》이

열리고 있다. 올 한해 개인전 《상록시》(합정지구)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

참여한 이후 세 번째 전시이다. 이는 2009년 첫 개인전 《헤이, 우리 소풍간다》(아트 스페이스 풀)

이후 2015년까지 개인전 《Temporary Storage》(갤러리 플랜트, 2011)과 2인전 《아역애아려》

(옵시스 아트, 2015) 단 세 번의 전시를 선보인 것과는 확실히 비교되는 행보라 할 수 있다. 활발한

활동을 통해 2016년 한국미술계에 ‘주황’이라는 이름 새겨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그의 작업을 주목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주로 여성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

그렇지만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미지 그 자체로만 머물고 있지 않다는 점은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다 면밀히 살펴봐야 함을 보여준다. 조금은 빗겨난 자리에서 주황 작가가 목도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 어디쯤에서, 애매하지만 분명한 메시지로 관람자들을

향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로 동시대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초상’일 것이다.

 

위장된 초상

한국에서 세 번째로 갖는 주황 작가의 개인전 《온전한 초상》을 구성하고 있는 두 축은

〈출발(Departure)〉과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이다. 이 두 연작은 각각 3층과 4층에 나뉘어 설치되어 있다. 주목할 점은 바로

모두 초상사진이라는 점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는 마치 화장품 광고 속

모델처럼 보이는 여성의 초상을, 그리고 〈출발〉은 인터넷 연예 기사에 종종 등장하는 연예인들의

‘공항패션’ 사진을 연상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가 처음 미국에서 작업을 시작하던

90년대 〈얼굴(Eol Gool)〉(1996)과 〈노래방(No Re Bang)〉(1999~2000)시리즈 역시 모두 여성의

초상이었다. 20년의 시간차가 있음에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한결같았다는 얘기다. 물론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사진 공부를 시작하던 시기, 뉴욕의 아시안 여성이라는

‘타자화’의 자전적 경험이 〈얼굴〉과 〈노래방〉으로 드러난 것이라면, 이번에는 그가 머무는

공간과 위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한국에서 자신과 같은 한국의 여성들을 본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외국 생활을 하던 탓에 한국이라는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또 다른 타자, 혹은

주변인으로서 도시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조금 빗겨난 그 자리는 생각 보다 많은 것들이 보인다.

빗겨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이상하고 낯선 지점들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초상사진의 경우 본질적으로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까닭에 인해 자칫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환원될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진 속 인물들 또한 모두

여성이라는 점은 이와 같은 우려를 한층 심화시킨다. 따라서 대상화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는

가가 주화 작가의 작업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작가는

역설적이게도 ‘초상’이라는 방법론에 더해 대상성이 보다 부각되는 유형학적인 틀을 전략적으로

채택한다. 초상의 외피를 입고, 그동안 초상이 재현해온 사진의 문법 체계를 비판하는 것, 다시 말해

초상 이면에 초상이 감주고 있는 것을 들춰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렇기에 표면적으로는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초상사진이지만 주황 작가의 작업에서 이 초상은 결코 명백하지 않고 오히려 모호하고

애매하게 다가온다. 즉 ‘위장된 초상’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해 보이는 것들을 전면에 드러내놓고서는

그 이면의 드러나지 않은 부분들을 넌지시 암시하면서 관람객들에 다음 수순의 자리를 넘겨준다.

 

이미지 뒤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드러내기

위장된 초상이 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4층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라 할 수 있다. 전시실에 설치된 9개의 사진들을 하나씩 감상하다 보면 이들이

화장품 광고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포즈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지어

화장품 광고와 같이 매끈한 ‘순백의 도자기 피부’로 표현된 아름다운 모습에서 그들이 ‘진짜’

모델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게 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볼수록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배우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이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은 누구인가?

왜 광고 속 여성과 같은 포즈, 같은 의상, 같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작가가

의상과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조명, 그리고 디지털 리터칭이라는 후반작업까지 한국 화장품 광고의

독특한 문법을 작업에 차용한 것은 적절히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질문은 이 사진 속 여성이 아닌,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화장품 광고 그리고

이를 작동시키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으로 질문의 방향을 돌려버린다. 누가 무엇을

아름답다고 만드는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백색(白色)’의 이미지다. 광고 뒤에 남는 것이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모델의 이미지라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얀 옷, 하얀 백옥피부 등은

모두 백색을 지향한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백색이 지니고 있는 의미 또한 남다르다. 순백, 순수,

순결 등 역시 백색에 닿아있다. 우월한 백색의 지위. 작가는 이를 우리의 ‘식민역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화이트닝을 파는 구조는 아마도 우리의 식민역사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서구의 백인들에

의한 식민의 역사 속에서 백색이 우월하다고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내재된 것이고, 외상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이 상품을 쓰면 우월해진다’고 하면서 상품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닐까.” 지배계급이 지닌 하얀 피부, 순결, 순수한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미지 또한 우월적이며,

그 우월성은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여성을 자극하는 광고의 훌륭한 재료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광고 전략을 역으로 사용함으로써 광고가 작동하는 기제, 즉 여성에 대한 이미지와 아름다움을

작동시키는 구조를 드러낸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 출품되었던 〈의상을 입어라〉(2016) 또한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작품이었다. 같은 흰옷을 입은 채 같은 자세, 같은 무표정을 하고 있는

사진 속 주인공들은 마트, 편의점, 사무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감정)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이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와 같은 하얀 옷을 입고 있지만, 이들이

입은 하얀 옷은 우월성과는 반대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노동 ‘유니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카메라의

시선을 빗겨나 서 있는 것처럼 카메라를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감정노동자와 이들 노동을 소비하는

자 사이에 시선의 교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마치 형광등 아래 창백하게 보이는 노동자들의 피부처럼

라이트 박스를 일렬로 설치한 방식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노동은 소외되고 관계는 상실되는

사회. 주황 작가가 포착한 여성 이미지 뒤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이처럼 작가는 여성과 결코 동떨어져 설명될 수 없는 그 ‘구조’라는 추상적 존재가 여성, 그리고

여성이라는 ‘이미지’ 이면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치밀하게 작동되고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의 디스플레이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일반적인 화이트큐브에서 사진 작품 하나하나가 주목받도록 되어 있는 반면, 이 곳 전시장의

조명은 밝은 것을 넘어 오히려 썰렁함마저 느껴진다. ‘여신’으로 호명되는 순간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른 특징들은 모두 배재된 채 대상화, 타자화 되고, ‘신전’은 박제화 된 가짜 여신들이 기거하는

공허한 장소가 된다. 이는 비록 여성의 외모만 해당되지 않는다. 정상과 정상이 아닌 것의 구분, 계급,

섹슈얼리티 등 판단과 분류의 스펙트럼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작가가 제목으로 차용한

테드 창(Ted Chiang)의 소설 〈Liking What You See: A Documentary〉가 외모에 대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하는 ‘칼리그노시스 칩’에 찬성, 혹은 반대하는 사람들의 결론 없는 대화로 이루어진

것처럼, 주황 작가의 작품 역시 답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발생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역전된 주체와 대상

그런데 주황 작가는 이와 같이 이미지 뒤에서 작동하고 있는 구조를 드러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였다면 그 다음은 바로 주체와 대상의 자리바꿈이다. 다시

전시 제목인 《온전한 초상(Her Portrait)》으로 돌아가 보자. 사실 전시에서 가장 먼저 의문이 드는

지점이 바로 이 제목이다. ‘온전한’과 ‘Her’의 어긋남. 영어로 ‘Her’은 상식적으로는 ‘온전한’으로

결코 번역되지 못한다. 의역을 한다 하더라도 그 거리감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미술사적으로

보아도 여성은 캔버스에 재현되어 남성의 응시를 ‘받는’ 대상존재로 여겨져 온 만큼, 인류 역사상

여성은 한 번도 ‘온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온전하지 않았던 대상으로서의 여성. 그렇다면

‘Her Portrait’에서 ‘온전한 초상’이 될 때,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오히려 (주체의) 온전함을 부여받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다.

 

3층에 설치되어 있는 〈출발〉 연작은 모두 공항을 무대로 하고 있다. 공항을 통해 어디론가

떠나거나 혹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역시 모두 여성이다. 그런데 공항은 어떤 장소였는가?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남성들이 독점해왔으며 배타적인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장소로 여겨져

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2016년 오늘의 한국은 이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남성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이 공항을 이용하고 있으며 그들이 떠나는 목적 또한 다양하다. 비즈니스, 어학연수,

유학, 국제결혼, 이민 등 이주는 이미 현대사회에서 삶의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주는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하기 위한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사진 속 여성들은 의지를 지닌 주체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황 작가의 사진은 일반적으로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응시를 거부한다. 역으로 사진 속

주인공들이 능동적으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전시 공간에서 이 사진들이 관람객을

둘러싸고 있을 때 바라봄과 보임의 구도는 역전되어 오히려 관람객이 사진 속 인물들로부터 응시를

당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남성이고 바라봄을 당하는 것이 여성이었다면

이 전시 공간에서는 기존의 경험들이 역전되는 것이다.

 

〈출발〉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무표정함(deadpan)’이 효과를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이다. 이들은 자신을 향해 응시하는 시선에 무표정함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무표정함은 기존에

주황 작가의 사지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얼굴〉, 〈노래방〉과 마찬가지로 〈공원에서〉

(2008)에서의 인물은 물론, 풍경을 담고 있는 〈Altered Landscape〉(2006~2010)와 서울 근교의

임시창고를 찍은 〈Temporary Storage〉(2010)에서도 대상은 무표정하다. 표정을 갖고 있어야 할

것들이 표정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표정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에서 빗겨나 있는 주황 작가의 사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낯선

감정은 대상으로서의 응시를 거부하는 동시에 판단 또한 유보시키면서 재현된 이미지 너머의 것을

보도록 촉구한다. 무표정함은 그 자체로 저항적인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판단력 보류는 가장

강력한 의미의 거부라 할 수 있다. 사진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립적으로 보이는 것을

다큐멘트 형식으로 위장하는 것이지 사실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관계의 초상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과연 역전된 주체 ‘그녀(Her)’들은 ‘온전’해 졌을까?

질문을 달리해서, 과연 주체는 온전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이미 나와 있다. 여성이라는

위치가 ‘구성’되어 온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자리를 바꿈으로써 대상에서 주체가 된 것이라면,

주체(의 자리)와 온전함의 가치 또한 ‘구성’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황 작가는

작업함에 있어서도 이처럼 판단 유보의 시선을 스스로 장착한다. 판단 유보의 태도는 온전한 대상화에

대한 작가의 거부이기도 하다. 매체 특성상 대상화가 불가피한 사진작업에서 작가는 주체의 자리,

마스터(master)의 자리를 벗어나 ‘함께’ 작업할 ‘협력자’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주체와 대상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이들과 만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사진은 오히려 주황 작가에게 적합한 매체이기도 하다.

손으로 그리기 때문에 오롯이 화가의 주관이 반영되는 회화와 달리 본질적은 기계인 사진은 아무리

사진 찍는 자의 의도를 넘어 대상의 주관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황 작가의 초상사진에 등장하는 모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황 작가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그들 각자의 개인성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화장품 광고 모델이 아닌

주황 작가의 동네 옷가게 사장님, 메밀국수 집 부녀가 되는 순간이 나오며, 공항에서 마주하는 낯선

이들의 개인성이 발현되는 순간이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는 단지 주황 작가와 사진 속 인물들 간의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관계는 주황 작가의 사진 속 주인공들 사이에서도 발생된다. 하얀 유니폼을

입고 무표정한 자세로 서있는 〈의상을 입어라〉(2016)의 창백한 감정노동자는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의 아름다운 여성이 될 수도,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해 공항을 떠나는

〈출발〉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듯이, 관계 안에서 주체와 대상의 자리는 결코 고정되지 않는다.

 

이처럼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의 긴장감과 우연성은 오히려 작품의 내러티브를 풍요롭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그래서 주황 작가는 초상사진 작업에 굉장히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모델 섭외 전

그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물론 사진 작업의 취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 줌으로써 처음에는 비록 낯설고 어색하지만 결국 본인의 표정이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초상 사진은 온전히 대상화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대상과 주체가

관계를 통해 중간에 만나는 지점을 서로 협력해서 찾아간다. 주체가 되기도 대상이 되기도 바로 그

지점에서 초상은 온전해지는 것은 아닐까. ‘밀당’을 통해 언제든 변화 가능한 온전함 말이다.

 

 

《온전한 초상(Her Portrait)》  2016.12.1.~2017.1.22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갤러리 2,3

 

글 장서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