我亦愛我廬(아역애아려) : 풍경을 부정하는 풍경의 가능성

 

알아먹기 모호한 전시 제목, “아역애아려(我亦愛我慮)”는 상허 이태준의 글, <란(蘭)>에서 인용

하였는데, “나 역시도 초라한 내 집을 좋아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집에서 난초 잎이나 닦으면서

빈둥거리는 즐거움에 대한 문장이다. “이르는 곳이 집이요 만나는 것이 모두 형제”라고 호방하게

외치던 이태준 선생께서 생전에 어렵사리 지은 성북동 집에 대한 애착을 아역애아려란 한문 투의

글로 표현했던 것이다. 바쁜 와중에 빈둥거리며 쉴 수 있는 유일한 지상의 장소가 “사랑하는 바로

이 집(一所我慮)”인 것이다.

 

이런 제목에도 불구하고 옵시스 아트에서 전시하는 주황과 황세준의 사진과 회화에서 집을, 그것도

망중한을 누릴 수 있는 장소를 떠올리기는 불가능하다. 아파트 단지나 공원으로 개발된 배후에서

버려져 있는 자투리 공간이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도심 외곽에 방치된 장소를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찍힌 사진(주황)과 달동네나 도심 주변 지역 빈민가 풍경을 탁한 색으로

얇게 그려진 그림(황세준)에서 어느 누구도 집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집을 떠올리기가

가장 먼 지점에서 난초 잎을 닦으면서 유유자적하게 놀고 있는 이태준의 문장을 떠올리는 것은

아이러니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맨틱한 느낌까지 든다.      

 

황량한 강변과 조악한 야산, 난 개발된 건설 중인 신도시 주변과 눅눅한 달동네 골목 속에 있는

가게들 등을 풍경으로 주황은 찍고, 황세준은 그렸다. 누구라도 그다지 찍고 싶지 않고 그렇게

그리고 싶지 않은 풍경을 전시 공간에 보란 듯이 내걸고 있는 것이다. 이런 풍경을 굳이 풍경이라고

한다면 차라리 살풍경(殺風景)이고 몰풍경(沒風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우며 눅눅하기만 한 장소에 거주하고 싶을 리가 없고, 보고 싶어 하기가 만무하다.

그런데 전시된 사진이고 그림을 보고 있으면 크게 이입되는 지점도 딱히 보이지 않고,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는데도 이상하게 돌아서면 뭔가가 미진하고 생각이 나는 것이다. 딱히

기억할만하고 눈길을 끌 만한 게 없는데, 괜히 잊히지가 않고, 잊기가 힘든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분명 작가가 가서 보고 찍고 경험한 강변이고 변두리 동네지만 그 공간이 있는 그대로 재현된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오히려 풍경은 아티스트들에게 발견된 것으로 묘사되고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창출되는 것이다. 실재로서 존재했지만 아무도 보지 않거나, 너무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치거나, 아니면 보고 싶지 않은 그 장소를 사진이나 회화를 통해서 보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본래 풍경이란 단순한 외부로 존재하여 발견된다기보다는 보는 사람의 태도와 지각 방식 변화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풍경화는 17세기경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 무렵에는 서양화의 중요한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18세기 루소가 “고백록”에서 공포와 위험의 대상이었던 알프스를 쾌락과 감상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알프스 자체야 루소가 경험하던

전이나 후에 변화가 없었겠지만, 경험 주체였던 루소가 알프스를 다르게 느끼고 행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알프스가 더 이상 공포와 위협을 초래하는 불쾌한 대상이 아니라 숭고한 풍경인 미적

대상으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풍경 속에서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고 감정이

고양되지만, 실상 감정의 근원은 알프스와 같은 대상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주체의

무한한 능력이 발동한 결과인 것이다.

 

산과 들이나 거리나 시장 등을 풍경으로 보기 위해서는 보는 사람이 확실하게 고정된 시점을

가지고 보는 대상을 통일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눈 앞에 있는 대상의 통일된 흐름이 중요하지,

시야에 들어온 사물 하나하나가 보는 사람의 감각을 구속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풍경을

풍경으로 보기 위해서는 풍경을 내려다보는, 풍경과 분리된 고독한 주체의 내면이 형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서 냉담하고 외적인 것에 무관심하여 외부를 보지 않으려는 내면이

생겨나고서야 비로소 자연과 나에 대한 몰입도 남과 나의 구별 없는 애틋함도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것이다. 게오르그 짐멜이 “풍경의 철학”에서 풍경이 상상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든, 미적 의미로

판단하든, 기분상으로든, 다른 것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자신만의 존재일 것이 요구” 된다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통일된 흐름을 포착하는 주관이나 그 주관에 바탕을 둔 자기표현 자체가

기하학적인 원근법과 같은 고정된 시점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풍경의 발견이 타자와 외부 나아가 역사까지도 배제된 결과로 생겨난 주체의 내면 때문에

가능해지면서 배제된 역사와 타자는 새로 표현하고 재현해야 할 대상이 되어 단순히 풍경으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숭고함을 경험하는 것이 주관의 능동적 개입인데도 눈앞의 대상에 기인하는 것처럼

느끼듯이, 자연적 풍경이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기술이나 표현 자체도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고립된

주체의 내면이 외부로 투사되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즉 내 눈앞, 내 바깥에서 펼쳐져 있는 풍경이

사실은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내 내부에서 형성된 특정한 시점에 따라서 보고 싶은 대로

보면서 몰입하고 감탄하는 것이다.

 

현대 미술이 내면성으로 관습과 제도에 대항한다고 하는 근대 미술의 이상에 대해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지점이 바로 이 내면성이다. 주체의 내면이야말로 현대 미술이 가장 격렬하게

형성되는 최전선이 되어왔다. 고정된 주체와 자의식의 중심을 해체하고 안과 밖 그리고 앞뒤가

뒤바꾸어 버린 심리적 장치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후기 인상파가 일본의 유키요에를, 피카소가

아프리카 공예품을 통해서와 같이 비서구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시도되면서 현대 미술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렸다.

 

주황과 황세준은 풍경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작업을 해왔다.

주황의 풍경 사진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그 풍경들이 의인화되어 사람처럼 느껴지다가 다시 풍경으로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인물 자체를 풍경으로 찍어왔던 방식 때문인지 역으로 풍경에서 인물로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뉴욕과 뉴헤이븐에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생활하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백인 동료들이 자신의 존재를 부재처럼 느끼는 과정을 체험하면서 스스로가 아시아 여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발견한 대상을 풍경으로 찍어왔다. 자신의 부재와 부정을 통하여 고통스럽게

작업의 대상을 발견했기 때문에 역으로 작품은 모든 감정을 배제하고 통제하면서 찍었고, 그 결과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시아 여성의 얼굴이 무감각하게 찍힌 작품을 볼 수가 있고,

또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부재와 부정의 공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덩그러니 내 눈앞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방치되어 있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도심 주변부 풍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한국에 돌아와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들이고

공간들인데 그녀의 사진을 통해서 잊을 수 없게 되고 뇌리에 새겨지면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주황이 부재와 부정을 경험하면서 대상을 발견한 데 비해 황세준은 오히려 너무 흔하게 널려

있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대상의 편재와 그것의 확인을 통해서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기하학적 원근법의 투시 속에서 구성된 균질적이고 통일된 풍경의 공간이 부여하는 회화적

깊이를 거부하고 다양한 시점이 혼재된 이질적 공간을 병치시켜 풍경을 얇게 펼쳐놓았다. 80년대

격동의 시기를 20대로 살면서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되고 은폐되었던 흔한 주변의 현실을

회화의 대상으로 계속 발견하면서 그럴듯한 형태를 만드는 그림을 의심하고 그 배후에 숨어있는

작도적 배치 자체의 자명성에 대해서 혐의를 가지고 주시해 왔다. 한 캔버스 위에서 다양한 공간이

혼재되고 이질적 사건이 개입되며 얕게 칠해진 채도가 낮은 색은 넘실거리고 그 위에 사람들은

생뚱맞게 서 있다. 아무런 연관성도 필연성도 느껴지지 않는 우연의 공간에 부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는 그의 그림이 매우 익숙한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매우 기괴한 비현실적 세계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웅기